근세(조선왕조 후기·토쿠가와 일본)의
한일 자타인식의 전회(çzń)
카츠라지마 노부히로 (일본 리츠메이칸대학교 문학부)
(1)
근세에 있어서의 일본·조선상 = 자기상(자타인식)의 전회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초로u禮·ś[1] 중화주의(Řĺ`)[2]v에 기초한 자타인식·화이사상(ŘÎvz)[3]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uv나uVv의 피아(Ţä)[4]의 보편성의 선양과 동시에u禮·śv을 기준으로 하는 중화로서의 중국상( )과 동이(Î)로서의 일본·조선상이 이 사상의 요점이다.
토쿠가와(úşě) 일본에서는 17세기(특히 전반)의 유학자의 사상은 대부분 이 유형에 해당한다. 유학자란 무엇보다도 그러한<禮·ś의 정신>의 보유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임을 상기하면, 물론 근세를 통한 유학자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Ą´ˇâ| 1561∼1619)가u가 있음은 하늘이 가리지 않는 곳, 땅이 놓이지 않는 곳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 나라도 또한 그러하다. 조선도 또한 그러하다. 안남(Ŕě)[5]도 또한 그러하다. 중국도 또한 그러하다v라고uv의 보편성과 u아, 중국에서 생기지 않고, 또 이 나라의 고대에 생기지 않고 현대에 생겨난다. 때로는 우연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v(w RćśśWx권 32)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아메노모리 호슈(JXFF 1688∼1755)가u이 세상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다 라는 속담에도 있지만, 정말로 도리에 부합하는 말이다. 도시가 있어도 시골이 없으면 나라가 성립되지 않듯이 중국이 있어도 이적(Îŕ˝)이 없으면 생육(śç)의 š는 완전할 수 없다v(w타와레구사x1권)라고u화이(ŘÎ)v의 상대성을 언급했고, 동시에u만약 깊이 사리를 알고 싶으면 언어풍속에 대해 당(중국)을 잘 이해하고 한(조선왕조)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v(w귤창다화(kb)x상권)u·Řv에서u사리()v를 요구했다. 게다가 막말에 사토 잇사이(˛ĄęâV 1772∼1859)가u유구한 우주에서 이 š는 일관하고 있다. 사람으로부터 보면, 중국이나 이적(Îŕ˝)이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본다면, 중국이나 이적(Îŕ˝)은 없다v(w언지록(žu錄)x) 공통의u하늘v아래에서의u화이(ŘÎ)v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오규 소라이(Źśhq 1666∼1728)의u중화·이적의 나라가 있는데 이것은 지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중화·이적이라는 성(Š)이 있지만, 이것은 혈연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적이란 예악(禮Ů)을 모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적(Îŕ˝)도 중화문명을 알면 중화(Ř)가 되고, 중화도 그 문명을 잃으면 이적이 되는 것이다v(w훤원이필(蘐ńM)x의 주장과 호슈의u나라의 존비는 군자·소인의 많고 적음과 풍속의 선악에서 결정되는 것이다v(w타하레구사x1권)라는 주장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지는 듯이 u예악vu풍속v=u문화v의 ŘÎ를 일관하는 상대주의가 이들 사상의 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u하늘v아래에서 공통의u문화v를 전제로 한 상대적 자타인식의 구조로서 이들 사상은 존재하고 있으며, 거기에는u지리v나u혈연v에 의한 고정적이고 바뀌지 않는 화이(ŘÎ)라는 의식은 기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야만 한다. 결국u예·문중화주의v적인 자타인식이란 특히uÎv와 같은 토쿠가와 일본의 유학자에 있어서는(그리고 필시 조선왕조의 유학자에게 있어서도) u지리v나u혈연v에 의존하지 않는 <예·문의 정신>을 요청한 인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u예·문중화주의v는 물론, 한일간에 투영된 경우에는 원리적으로는 상대적인 자타인식, 보편적인 관념에서부터의 자타인식으로서 표명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후지와라 세이카의u가 있음은 c 이 나라도 또한 그러하다. 조선도 또한 그러하다. 안남도 또한 그러하다. 중국도 또한 그러하다v라는 언설에서 전형적으로 간파할 수 있지만 한편, 화이의 계층성에 착안한다면 상호의 차별화의 원리로서 작용하는 것도 많았다. 그리고 중국과 인접한 조선 측에 현저하게 보여지는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의식>은 그러한 것으로서 파악할 수가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LbGg)의 조선 침략이라는 만행이 이 관점을 결정적으로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토쿠가와 막부로부터의 수교요청을 받아들인 조선왕조의 묘의(_c)[6]에서 선조가 왕도(¤š)에 거이(Î)의 도(š)는 없다고 말했다는 에피소드에서 나타나듯이 대일불신을 하지만 유학적 수교원리는 상실되지 않은 것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통신사의 파견이 결정된 배경은 물론 여러 정치적 요인을 거론할 수 있지만 u예·문중화주의v에 유학적 수교원리의 존재도 간과할 수는 없다. <문화적 우월의식>을 명백히 주장할 수 없는 토쿠가와 일본측에서는 조선을 강하게 차별화 하려는 언설은 특히 근세 초기의 유학자에 있어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강항(Iú÷)에게 송학(v{)의 기초를 배운 세이카(ˇâ|) 등에서 보면 오히려 조선왕조가 보다u禮·śv에 뛰어나다는 의식이 있는 것이 당연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것은 세이카보다는 조선 차별의식이 강한 하야시 라잔(Ń R 1583∼1657)도 마찬가지로 1643년에 통신사가 Ňú했을 때 그 학식에 깊은 감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wŃ RśWx). 그렇지만 일본측이 조선관을 생각하는 것에는 이러한 유학적인 원리 이외에 고대 이래 생겨난 신라에 대한 적대의식을 토대로 한u조선 = 조공국v관의 존재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서기u신공황후삼한정벌(_÷c@OŘŞ°)v신화가 백제계 망명인마저 담당자로 했던 고대황제국가·율령제국가의 자기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은 명백한데, 이 신화가 역시 근세기의 지식인이나 민중에게도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토쿠가와 막부가u무위(Đ)v에 의한 통치를 위해서 연출한 통신사 = 조공사관도 한 몫 해서 조선에 대한 안비바렌트(ambivalent ; 양면 가치의, 상반되는 감정을 지닌)한 인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통신사의 박식에 경악해 있던 라잔도 제2회 통신사 Ňú을w조선신사래공기(ŠNMgŇvL)x라는 ź에 나타나듯이u래공(Ňv)v이라고 파악해u조선은 고대 이래부터 우리의 서만(źŘ)이다v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이 의식은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2)
그런데 근세기 한일의 자타인식의 전회를 생각하는 중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17세기의 약 1세기에 걸쳐 아시아지역을 뒤흔들었던 명청교대(žűCđă) =u화이변태(ŘÎĚÔ)v(1612년 후금건국, 1644년 명의 멸망, 1662년 청에 의한 통일)에 의해 생겨났다고 생각되는u조선형 화이사상vu일본형 화이사상v일 것이다. u일본형 화이사상v은 야마가 소코(Rfs 1622∼1685)·쿠마자와 반잔(FŕV×R 1619∼1691)·야마자키 안사이(RčĹâV 1618∼1682)·아사미 케사이(ÇŠăDâV 1652∼1711)등의 언설(ž說)을 그 대표로 거론할 수가 있다. 알려져 있는 사료를 이하의 몇 가지를 게재해 둔다.
천하에서 일본과 중국만 함께 천지의 정수(¸G)를 얻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도 아직 일본의 수진(GáÁ)에는 뒤떨어져 있다. (중략) 하물며 조선은 약소국이다. 홀로 일본은 하늘의 정도(łš)의 중심에 위치하고, 지리적으로도 중국(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만국의 화육(ťç)이나 천지의 정위(łĘ)와 위(Ę)를 같이 하고, 경계에 장성(ˇé)을 만드는 수고도 없고 융적(^ŕ˝)에게 공격 받을 걱정도 없다(야마가 소코wŠx중국Í).
Ä(Ř)는 천지의 중국( )으로서 사해(lC)의 가운데에 있다. 남으로 6개의 나라가 있고 서로 7개의 나라가 있고 북으로 8개의 나라가 있으며, 동으로 9개의 나라가 있다. 이것을 사해(lC)라고 한다. 남을 만(Ř)이라고 하는데 벌레를 본뜬 것이다. 서를 융(^)이라고 하는데 개를 본뜬 것이다. 북을 적(ŕ˝)이라고 하는데 짐승을 본뜬 것이다. 동을 이(Î)라고 하는데 사람을 본뜬 것이다. 따라서 동이(Î)는 천지 안에서는 우수하다. 구이(ăÎ) 안에서는 조선·유구(Ž )·일본이 우수하지만, O 중에서는 일본이 가장 우수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중하를 제외하면 천지 안에서는 일본에 따를만한 나라는 없는 것이다(쿠마자와 반잔wW`ax8권).
중국 Îŕ˝의 이름은 당()이 붙인 이름이다. 그것에 따라 일본을 Î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의 모방이다. 단지 자신의 나라를 안(內)으로 하고 이국(Ů )을 밖(O)으로 한다면 내외 빈주(oĺ)는 명백하게 되며, 우리나라(á )라고 부르고 다른 나라(Ů )라고 말한다면 내력이 통하는 것이다(아사미 케사이w x).
이들은 모두 선행하는 사상이 명말(ž)사상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비판하고 그것과 함께už중화주의v에서 탈각한u일본적 내부v의 <문화적 우위성>을 주장하려고 한 발언이라고 파악된다. 다만, 반잔은 위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u구이(ăÎ)v중에서u일본v의 우위성을 말하고, u방위(hq)vu안민(ŔŻ)vu역성혁명(ŐŠv˝)v등의 점에서u중국v보다도u일본v이 우위라고 한 소코(fs)도 u{Š의 인물은 거의 중화에 가깝다. 그 풍속은 순박하고 šl의 ť를 볼 수가 있다v(wRęŢx제33권)라고 하고 있듯이u중화(Ä)v를 축으로 하는 시점을 보고 있다. u일본형 화이사상v은 최초에u禮·ś 중화주의v를 근저로 한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케사이도 위에서 보듯이u천지는 밖을 에워싸고 어디까지 가더라도 하늘이 놓여지지 않은 곳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각각의 토지 풍속은 (중략)존비귀천(¸ÚMćË)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v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소코가u천지간에 인물이 생기는 곳은 아주 많지만, 단지 일본만 하늘의 기가 화합하여 지맥이 조화롭고 인물의 정수(¸G)는 사이(lÎ)와 다르다. 때문에 성인군자가 세상에 번성하고, 인의충효(m`F)의 설(說)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또한 자연의 힘(¨)이라고 말해야 한다v(ŻO)라고 한다. 또 사토 나오카타(˛Ą źű 1657∼1719)와 같이u일본형 화이사상v자체에는 반발하면서도u원래 중국 이적(Îŕ˝)이라고 하는 것은 지형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풍속 선악으로 말하지는 않은 것이다v(w _Wx)라고 말하듯이u자연v이나u지형v에 의해u화이v사상이 파악되고, 케사이 등의 안사이 문하에 의한 귀속의식에 근거하는u內·Ov론에 의한u화이v론이 등장한다(u일본적 내부v의 발견). 따라서 문화적 가변성이 상실되고 있는 점에서 이u일본형 화이사상v의 중요한 특질을 간파할 수가 있다고 생각된다.
실은u일본형 화이사상v은 18세기가 되자 학파를 초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즉, 다자이 슌다이(žé tä 1680∼1747)의w변도서(çš)x를 둘러싼 논쟁을 비롯해 18세기 지식인의 언설에u일본형 화이사상v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u국제인vu조선과의w˝MOđx의 추진자v로서 칭양되는 아메노모리 호슈도 자타인식에 주목한다면u일본형 화이사상v논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호슈는 청(űC)을u중화의 éFv을 상실한u이(Î)가 화(Ř)로 바뀐v것이라고 간주하고(w속 호저풍아집(ă ČăIëW)x14권), 다른 한편으로 일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칭양하고 있다.
일본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땅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군자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인(m)을 칭찬하는 것이다. 또 동방의 수역(ćć)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령(ę)을 칭찬하는 것이다. c우리나라는 땅의 동쪽에 위치하여 봄에 해당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인(m)의 나라인 이유이다(w귤창문집(kśW)x1권).
일본은 사람들의 마음이 순진하고 Ĥ(Ř)의 풍속에 가깝다. (w타하레구사x1권)
일본의 정치제도는 주(ü)의 봉건제도에 가깝고 나라의 사대부는 그 국록( âR)을 세습하고, 노약(老á)자 모두는 조석으로 친하게 지내며 인품의 선악을 서로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제각기 어울리는 인물을 직무에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제도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우수하다. (w타하레구사x2권)
호슈가 일본을 이렇게 칭양하는 것은u천양무궁(Vßł)v한u신윤성손(_űšˇ)v( = 천황)으로의 찬미에 근거하는u천황 = 국왕v론이고, 게다가 삼교일치론(OúÍęv_)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이 하쿠세키(VäÎ 1657∼1725)에 의한 조선통신사 완국서(ŠNĘMgś )에서 일본국왕호uĺjv에 반발했던 것도u하늘을 몸체화한 태양과 나란히 칭송되어야 할 성통(š)v한 천황이야말로u국왕v이고, 장군이 국왕이라 일컬어지는 것은u무계(łm)의 일v이며u공순(ą)의 `를 잃어vu조상의 법(@)에 벗어나는v것이기 때문이었다(w귤창문집x2권). 이 천황론이나 일본론은 학파는 다르다고는 해도 키몬파(čĺh)·스이카파(Áh)를 방불케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호슈와는 달리uR= ¤v이라고 논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아라이 하쿠세키도u무()v뿐만 아니라, uâX·śv에 의한u국체( é)v의 연출에 노력하여(w강관필담(]čMk)x조선과의u적례(Gá)v외교와 무엇보다도 중화문명권에서의 토쿠가와u국왕v의u자립v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 주목된다. 하쿠세키는 대조선관에 대해 호슈와의 비교로 주목되는 일이 많은데 조선에 대항적인uâX·śv의 토쿠가와 일본에서의 실현을 지향했다는 의미에서는 u일본형 화이사상v의 논자(論Ň)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u삼대지례(OăVâX)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은 많다v라는 것이 하쿠세키의 역사인식의 하나의 기둥이었던 것도 이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w고사통혹문(ĂjĘ˝â)xş).
u조선형 화이사상v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주지한 바와 같이 조선왕조 중기 이퇴계(1501∼1570)와 이이(栗J 1536∼1584)의 등장과 함께 조선 성리학이 확립되었고 이것과 함께uâX·ś 중화주의v적인 자타인식도 조선의 선비층을 중추로 정착했다고 생각되어진다. 게다가 명과의 조공관계나 대명사대가 명 = 중화이고, 조선 = Ź중화라고 하는 의식이 확대된 것이 조선측의 큰 특질이다. 또, 1627년의 정묘호란(KÓŞ) 1636년의 병자호란(¸qÓŞ)과u화이변태(ŘÎĚÔ)v에 의해 조선 Ź중화사상은 17세기를 통해서 학파를 초월한 일반적 의식이 되어간다. 1623년의 인조반정(mc˝ł)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서인파 노론계(źlh 老_n)의 대표적 지식인 송시열(1607∼1688)의 북벌론은 이러한u화이변태v후의 ŹŘ사상을 대표하는 것이고, 명(ž)의 적통()을 잇는 ŹŘ와 예의(âXV)의 나라로서 청(űC)을 정벌하는 것은u춘추(tH)의 대의(ĺ`)v라고 주장한다(w송자대전(vqĺS)x.
중화(Ř)는 지역에 관계없이 성립하는 것이고, 특히 기자(Ľq)이후의 전통에서의 조선은 âX·ś상에서 중화라는 의식이 주목된다. u조선형 화이사상v이란 u일본형 화이사상v과 분명히 동일한 구조에 선uâX ·ś 중화주의v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음이 이해될 것이다. 그런데 청의 현실적 타파의 곤란함이 밝혀진 18세가 되면 u조선형 화이사상v은 조선이야말로 유일한 중화라고 하는u조선 중화주의v로 전회(çzń)해 간다. 특히 같은 서인파에 속하는 소론계(_n)의 김약행(생사년도 미상)과 이종휘(1731∼1786)에게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말해지고 있다. 물론 한편으로는 노론 낙론계의 북학론도 등장하고, 혹은 학파는 다르지만 남인계나 긴키(ßE) 남인계(실학계)에게는 청(űC)긍정론이나 서학(ź{)연구도 대두되는 등 재야도 포함되어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고 있었음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왕조의 묘당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은 우여곡절(âüéPČÜ)은 있지만 노론(老_)·소론(_)계의u조선 중화주의v이고, 특히 서구에 대한 위기의식이 두드러진 19세기가 되자 노론계의 주장은 다시 한 번 강화되어가게 된다(하우봉u조선후기 대외인식의 추이vw역사학 연구x678호, 1995년 11월호)
한일 상호의 타자인식이라는 시점에서 보면 u일본형 화이사상v과u조선형 화이사상v은 자기를 어떤 의미에서의 중화·소중화라고 인식한 이상은 조선이나 일본은 자기보다도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존재라고 하는 의식이 강화된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받은 조선측에서 일본을 보는 언설(ž說)이 다수 보이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한편 여기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uâX·śv주의적인 화이사상이 밑바탕에 있는 이상(특히 이 퇴계 학파에 있어서) 토쿠가와 일본에서의 유학자가 칭양 받은 적도 있었다. 예를 들면w흑치열전(üKę列B)x을 저술한 허목(1595∼1682)은 토쿠가와 막부가 유서(ň)를 요청한 사태를u만이(ĺĹÎ)의 성사(ˇ)v라고 칭양하고, 또w동사강목(jjÚ)x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안 정복(1712∼1791)도 그 유학적 언행에서 야마자키 안사이학파나 이토 진자이를 칭찬하고 있다(이호윤 박사논문). 토쿠가와 일본측에서도 앞에서 보았듯이u일본형 화이사상v은 일본을 조선보다도 우위에 두는 주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인식의 틀 자체를 파악해 보면 u일본형 화이사상v의 영향 하에 있던 아메노모리 호슈는u국경v이나u인종v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u문화v보편주의의 발상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고, 특히 조선인과의u교린v의 소임을 맡은 호슈가 u조선교접의 V는 첫째로 인정사세(lî¨)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v라고 하여 구체적인u일본과 조선v과의u제사풍의(`)v가 다름에 유의하고 있었고, 게다가u미미즈카(¨Ë)라는 것은 토요토미Ć가 무법적인 침략을 행하여 양국의 무수한 인민을 살해한 증거인데, 이것을 통신사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결코 문명인의 할 짓이 아니다v라고 말하며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특필해야 할 사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w교린제성(đ×ńÁ)x.
w조선풍속고(ŠNl)x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도 보여진다.
조선국은 한토(ży, 중국) 성인의 덕화(úşť)가 자연히 나라 안에 미치고, 화풍(Ř)을 사모하여 옛날부터 지금까지 바뀌어진 것이 없는 나라이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나라 안의 ĺ는 사자(gŇ)를 중국으로 보내어 중국의 지도(w¤)를 요청하고 있다. 청조로 바뀌어서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있음은 명조의 시대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청조는 원래 이적(Îŕ˝, 오랑캐)이기 때문에 좋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중략) 조선국을 예의의 나라라고 하고, 또는 약한 나라라고 일본인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해이다. 천지간에 어떠한 나라라도 âX나 `가 없이는 나라 안의 치평(Ą˝)은 성립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조선에 있어서도 예의가 만국에서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관혼상제의 禮에는 신분에 구속되지 않고u문공가례(śöĆâX)v의 법을 이용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문자를 즐기고 있는 것은 다른 이적과는 다른 우수한 점이다. 또 약한 나라라는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공격했을 때 많은 조선인이 죽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때 조선은 평화로운 시대로 사람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으며, 일본은 난세가 계속되어 국내에 무사공자(÷Ň)가 많아 조선은 불의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토쿠가와 일본의 유학자가 당시의 온당한 조선관을 나타내는 귀중한 사료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얼핏 보면 과격하게 보이는 상호의u멸시v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u문화v보편주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근세의 상호 자타인식의 커다란 특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19세기 이후의 자타인식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국민 내셔널리즘에 대해 미리 간단히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일반적으로는 국민 내셔널리즘이란 고대인이 상상한 한정적인 공동체 귀속의식을 텍스트로부터 읽기 시작해서 그 귀속의식이 마치 국민 전체의 고대 이래의 귀속의식인 것처럼 상상하는 것이고, 근대의 시간상(Ô)에서 창조(날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귀속의식의 근간에는 언어·혈연·문화(î)적 공동성의 상상이 존재하고 있다. 고대인이 남긴 텍스트를 문헌학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실제는 고대의 극히 일부 사람들의 상상된 귀속의식을 밝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근대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u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국민v이 상상해 가게 된다. 이러한 것이 자명한 것으로서 상상되어 가는 중에 물론, 출판혁명과 속어의 보급, 군대의 역할 등도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앤더슨(Anderson)이 19세기의 유럽에서 국민 내셔널리즘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u속어사전 편찬자, 문법학자, 언어학자, 문학자v였다고 하듯이(w상상의 공동체x) 19세기 말 ∼ 20세기에 있어서의 국민적 학문의 학술적 제도적 성립이 국민 내셔널리즘의 창조 = 상상에 있어서는 중요한 모멘트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여기서는 적어도 이러한 자타인식이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든 화이사상적 자타인식이 해체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타국민에 대해서는 국민 내셔널리즘은 보편성을 가지지 않은 배타적·비합리적 의식으로서 드러남을 확인해 두고자 한다.
토쿠가와 일본에 있어서의 화이사상의 해체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노리나가(éˇ)의 자타인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éˇ, 1730∼1801)는 uĂĚv에 있어서의 언어적 시원(nš)의 가공으로부터 유출된u황국v의 동질성과 외부와의 차별적 경계를 주장하고uÓ와 와 žv에 있어서의u황국v의 동질성을 내부적으로 구성하려고 한u(국민)내셔널리즘의 예언자v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u황국의 정음(łš)v이라는 가공에 의해 최종적으로 중화문명권의 표상으로서 존재해 온 한자를u이국(Ů )v의 언어로서 발견하여uďv로서 배제하고, 그것에 의해u황국v의 자명성을 확보하는 강력한 주장의 등장이라고 하고 있다(w한자삼음고(żOšl)x.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u황국의 정음v이 다른 방향으로 한자가 가공된 것이고, 지금이야말로u이국(Ů )의 도(š)v가 된 중화문명권과 대치한u고대v로부터의u황국v의 문화적 동질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노리나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의 태도·인정은 언어의 상태에 따라 추측할 수 있는 것이고, 고대에 관한 것도 그 언어를 잘 밝히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한문으로 쓰여진 책을 그대로 훈독으로 읽어서는 어떻게 고대의 언어나 고대의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인가. 고가(ĂĚ) 등을 보아도 황국의 고대의 의언(Óž)이 중국의 것과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w고사기전(ĂLB)x1권).
이것을 보면, 노리나가는u한문책v과의 대비로u중국의 언어와 엄청나게 다르다v는 것으로서u황국의 고대 언어v를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해 그것을u잘 밝혀야v할 것을 말하고, 그것으로u황국의 고대 사람의 태도·인정v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사료(jż)는 노리나가의 방법론으로서 잘 알려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u사람의 태도·인정은 언어의 상태에 따라 추측할 수 있는 것v이라는 노리나가의 주장에 인도되어u고가(ĂĚ) 등을 보고 황국의 고대 언어가 중국의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v을 알기 위해서u중국의 것과 아주 다른vu황국의 고대 언어v에 의해u황국의 고대 사람의 태도·인정v을 규명한다는 그 자체가 다름 아닌u황국의 고대 언어v를 가공해가는 당시의 모습을 잘 나타낸 사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u황국의 고대 언어v의 가공에 의해 유불(ňĹ)v·중화문명권의 주장은 보편성을 박탈당해u이국(Ů )의 유불v로 되었던 것이다(w고사기전x1권). 따라서 우리들은 노리나가에 의한u황대어국(cĺä , 일본)은 고귀한 신의 조상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VĆĺä_)가 태어난 나라v라고 한 주장과u황통은 즉, 이 세상을 비추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자손이고 천양무궁한 신칙(_ş)과 같이 만만세 후대까지도 변하지 않는다v라고 한u황국v의 매우 동떨어진 우위성의 주장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w고사기전x1권, wĘ쿠시게x등). 그러한 주장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논자가 지적해 왔듯이 비합리성이 두드러진 점에서 특필되어야 한다고 해도, 앞에서 말한 17세기 이후의u일본형 화이사상v논자도 비슷한 논리를 말하고, 그 비합리성의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전쟁 전의 국체사관적 저술이 야마카 소코, 쿠마자와 반잔, 야마자키 안사이 학파(čĺh)·스이카파(Áh), 게다가 케이츄(_Ť 1640∼1701), 카다노 아즈마마로(×c tŢ 1669∼1736), 카모노 마부치(ęÎ áÁŁ 1679∼1769)의u대성자v로서 노리나가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 노리나가가 해체한 것, 그리고 그것에 의해 자명시 되어 버린 것 같은 사태를 오히려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통하고 있다. 과연, 고대 동경론(˛Ű_)이나 신도론(_š_), u모노노아와레v론에서도 노리나가가 여러 가지의u당대문화v와 관련하여 이론을 구축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거기에u대성자v로서의 노리나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은 사실이다.u자연의 신도v라는 초기의 노리나가의 주장이 카모노 마부치의 신도론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u내셔널리즘의 예언자v로서의 노리나가가 실시하고 자명화한 것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 반복하지만, 노리나가가u결정적으로 언어를 끊어버릴 만큼 깊은 단절v을 초래했던 것은u황국(일본)의 고대 언어v의 가공에 의한u황국v의 동질성선양에 의해u유불v·중화문명권의 주장이u이국의 š에는 일절 관여해서는 안 된다v라고 선고하며(wĘÔx7권),
u이국의 유불v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때까지 uâX·śv이라는 가치 안에서 그 문명권에서의 공동성에 입각하면서 가치의 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주변부나 문화적 계층적u타자v와 대치해 온 자타인식이u허구적 에스니시티v로서의 언어공동체의 동질성에 입각하면서
u상상의 자연v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공동체를 경계 밖으로 배출하는 자타인식으로 이행하는 것이고, 18세기의 사상공간을 엄격하게 가르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날의 눈으로 파악한다면 노리나가가 없어도u누군가가 그의 장소를 메웠을 것이다v. 그 주장이 세계사적인u인종·민족v의 주장, 바꾸어 말하면u국민v시대의 주장의 일익으로서 토쿠가와 일본에 출현했던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18세기 말기에는 아직 자명성을 획득하는 주장은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오자 노리나가가 화이사상 = 중화문명권에서 해방된 자타인식이 그 자기상을 부착시키는 가치의 축(Jl˛)을 요구하며 부유(V)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점차 서양지식으로 향해가는 것은 실은 노리나가에게서도 싹트고 있던 방향성이었다. 예를 들면, u긴키대가 되어 요(ęĄ)나 서(ź)의 사람들은 해로(CH)를 사람에게 맡기고 널리 돌아다닌 결과 이 대지의 모습을 잘 보고 연구하여 지구는 원으로 허공에 떠있다는 것과, 해와 달은 그 상하로 회전하는 것 등을 발견하고, 중국의 옛설은 모두 많이 다르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v라고 말하는 핫토리 나카츠네(f 1757∼1824)의wOĺlx. 노리나가는 이것을w고사기전x17권의 부록으로서 수록하고 이wOĺlx야말로 히라타 아츠타네(˝cÄű 1776∼1843)의w영능진주(čË\áÁ)x집필의 직접적 기폭제가 된 것을 상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노리나가에게는 여전히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이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바야흐로, 19세기에 들어온 직후에 활동을 개시한 아츠타네와 후기 미토학( 戶{)의 아이자와 야스이(đŕVŔ 1781∼1863) 등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그 점이다. 막말 국학이나 후기 미토학은 다가오는 서양을 다른 한편에서 바라보면서 화이사상으로부터 해방된u황국(c )v상()을 자기충족적인 국민 내셔널리즘으로서 계속 새겨가게 된다.
대조선관에 대해서는 이러한 국민 내셔널리즘이야말로 근대 이후에 확실히 배타적·배외적인 차별사상의 바탕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리나가에 대해서는 강석원(Iŕł)의 우수한 연구에 의해 밝혀진 대로(w우에다 아키나리(ăc HŹ)의 연구x) 조선 속국관에서 아주 차별적인 것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고대 한일관계가 아주 긴밀한 것이었고 그 문화적 영향력이 압도적인 것이었음을 입증하려고 한 토테이 칸(Ąĺ˛ 1732∼1797)의w충구발(Őűá˘)x에 대해 노리나가는w겸광인(ççśl)x을 저술해서 반론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대의 조선의 나라들은 대부분은 일본에 복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왕래가 성행하였고, 서로의 땅에 머무는 사람도 많았으므로 언어뿐만 아니라, 의복·기재(íŢ)·풍속 등도 일본에서 조선으로 옮겨간 것이 많았다. 그것을 반대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옮겨갔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그릇된 것이다.
국학의 눈으로써 본다면, 외국은 전부 천축(Vą, 인도)도 한국(ż , 중국)도 삼한(OŘ, 조선)도 그 외의 나라들도 모두(고사기에 기재되어 있다) 스쿠나비코나노_(ŹFź_)[7]이 창시한 나라인 것이다.
w충구발x은 일본의 황통이나 언어의 대부분이 조선에서 전래했음을 입증하려고 하고 있던 점에서 확실히 사건성을 가지고 근세의 사상공간에 출현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리나가는 충분한 반증도 거론하지 못한 채 기기신화(LI_b)의u사실v에 근거해서 속국관을 토로하는 것에 시종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노리나가의 자세는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로 일본의 국민 내셔널리즘의u숨겨진 문제v로서 계승되어가게 된다(코야스 노부쿠니[qŔéM]). 조선침략론에 대해서도 부언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대외위기 하에서 국민 내셔널리즘이 고양해가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기에 출현한 주장이었다. 서양의 침략에 위기감를 안고 있던 論Ň 하야시 시헤이(1783-1793), 사토 노부히로(1769-1850), 요시다 쇼인(1830-1859) 등이 근접한 지역의 침략·병합·u내국화v에 의해 그 해방(Ch)을 도모한다는 시점에서는 공통된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는 화이사상 해체의 소산으로서 생겨난 것이었기에 주목해 두고자 한다.
화이사상적 대외관에서 본다면, 이(Î)는 방치·방임되던지, 문명의 덕화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지, 위치가 부여된 것이다. 마츠다이라 사다노부(ź˝čM)의u에조치 히요케치v론 등은 그 전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이적시(Îŕ˝)라는 의미에서의 차별적·계층적 시점이 가로놓여져 있다. 하지만, 거기로부터는 무력침략론도 생기지 않은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조선 침략론이란 의미에서는 고대신화에 근거를 두면서도 (약간의 신중히 검토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실은 화이사상과는 아무 관계없는 국민 내셔널리즘의 산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4)
조선왕조는 19세기에 들어와서 기본적으로는 화이사상적인 자타인식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논의 되어야 하겠지만 거기에 중화문명의 보지자(ŰŇ)로서의 자랑이 강하게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근대 이후의 한일관계는 노출된 폭력적 제국주의에까지 둔화된 일본의 국민 내셔널리즘과 그것과는 대치·반침략 운동을 매개로서 급속히 확대된 조선의 국민 내셔널리즘에 의해 장식되어가게 된다. 그리고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기본적 책임은 침략한 일본측에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을 새롭게 직시하기 위해서는 근대 이후의 자타인식의 형성과정을 더욱더 신중하게 검토해나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그 일조(ę)로서 하나의 다른 근세적인 자타인식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이다.
[1]) 전례(TâX)와 문화. 예법(âX@)·제도·문물 등
[2]) 중국에서 한(ż)민족이 주위의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각 민족(동이[Î]·서융[ź^]·남만[ěŘ]·북적[kŕ˝]이라고 부르는)에 대해서, 스스로를 세계의 중앙에 위치하는 문화국가이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부르는 자칭. 중하(Ä).
[3]) 중국인이 스스로를 중화라 불러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사상. 또는 자기 나라를 중화라 하여 존중하고 주변의 다른 부족을 이적(Îŕ˝)이라 하여 천시하였기 때문에 화이사상(ŘÎvz)이라고도 한다. 이 사상은 본래 유교의 왕도정치이론(¤šĄ論)의 일부로서 형성되었다. 왕의 덕을 기준으로 한 문화적인 동화사상이 중국에서 형성된 것은 전국시대(D ă, BC 5∼BC 3세기)부터 진(`)나라·한(ż)나라에 걸쳐서였다. 중화사상이 다른 종족 문화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그들 문화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화문화에 동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에 한해서였다.
[4]) 저와 나. 저편과 이편
[5]) 외국이 베트남을 가리키는 호칭. 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시대의 중부 베트남을 가리킨다. 원래는 남방의 안녕(Ŕ寧)을 뜻하는 중국어로서 오늘날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북부 베트남은 BC 1세기 이후 중국 식민지가 되었는데, 수(ä@)나라 때 교주대총관부(đBĺă`Ç{), 이어 교주도독부(đBsÂ{)가 설치되었다. 당()나라는 679년 이곳에 6도호부의 하나로 안남도호부(Ŕěsě{)를 설치하여, 오늘날의 북부 베트남 전역부터 중부 베트남 북반까지를 소관으로 했는데, 이때부터 안남이라고 하게 되었다.
[6]) 묘당(_°) 즉 조정(Šě)의 평의(]c). 조의(Šc)
[7]) 타카미무스비노신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