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있어서 한・일 사상사의 일고찰

- 후기미토학(後期水戶學)과 허유(許愈) 사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桂島 宣弘

一.

일본에 있어서 18세기말기로부터 19세기 초두의 자타인식(自他認識)과 아시아 침략에 귀결되는 근대 내셔널리즘의 생성 과정을 검토하는데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러시아의 접근에서 시작된 서양 세계와의 「만남」(= 웨스턴․임펙트, 서구의 충격)이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오랑캐’(夷狄)로 여겨져 인식의 범위 밖에 벗어나 있던 서양 세계의 현실적인 등장이 화이사상(華夷思想)적 자타인식에 결정적인 동요와 해체를 야기 하여 그 구조에 근본적인 변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공통된 상황이었다.

일본의 경우 유학적 사유(思惟)․화이사상적(華夷思想的) 자타인식의 해체가 비교적 용이하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있어서는 일본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1) 이것은 한일 사상사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발표에서는 일본의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과 한국의 허유(許愈, 1833-1904)사상과의 사상상의 비교로부터 부상되는 사상적 특징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 一端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후기 미토학의 시조인 미토번주(水戶藩主)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 1800-1860)가 에조치(蝦夷地)2)에 관해서 논하고 있는 것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19세기 초두의 정세를 위기라고 파악하고 있었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해마다 걱정이 늘어나 나날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긴급한 문제는 에조치(蝦夷地) 문제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대외위기(外患)’에 관해서 특히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에조치(蝦夷地)에 러시아가 접근하는 것이었다.3) “러시아가 침략해 오는 것은 에조치(蝦夷地)를 먼저 획득하고, 그 다음이 츠가루(津輕)4), 난부(南部)5) 등으로 침략해 올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뿐 만 아니고, 모든 서구열강(西歐列强)이 북방으로부터 침략하여, 그 후 사도(佐渡)6), 오키(隱岐)7), 츠시마(對馬)8), 또는, 하치죠지마(八丈島), 오오시마(大島)9), 류큐(琉球)10) 등을 손에 넣은 후, 드디어 일본 전국 방방곡곡으로 밀어 닥침에 틀림이 없다”11) 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는 결국 일본 전체를 집어삼킬 것임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 1830년대 단계에서의 나리아키(齊昭)의 대외 위기의식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치시마(千島)라고 하는 것은 에조(蝦夷) 북 캄챠카(北カムチャッカ) 사이의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래부터 일본 영토이다”12) 라고 강조하는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에게 있어서 1806년에서 1807년 사이에 러시아선이 에조치(蝦夷地)를 ‘습격’한 사건(후보스트후 사건․フヴォストフ事件)이나, 이미 시행되고 있었던 막부(幕府)에 의한 동서 에조치(蝦夷地) 직할정책의 변경(1821년)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는 1833년에 스스로 “마츠마에(松前)13), 에조(蝦夷), 카라후토(唐太島)14) 등을 미토번(水戶藩) 영지로 하는”15) 것을 바라면서《북방미래고(北方未來考)》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그 개발계획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에조인(蝦夷人)16)을 길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깔보며 업신여겨, 은혜를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왔는데 은혜만 주면 반드시 온몸을 바치는 자들이다.

······(중략)······

머리에 쓰는 것, 신발, 목욕, 또는 무릎 꿇는 것은 지금까지 금지되어 왔지만, 이후부터는 금지를 해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염을 깎고 머리를 묶게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반발도 있겠지만 2, 3년 정도 지나면 긴 수염이나 흐트러진 머리는 번거로울 것이므로 반드시 일본 풍속에 친숙해 져 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일본아를 사용하게 하고, 에조어(蝦夷語)를 금지하며, 기혼 여성은 눈썹을 깎게 하고 미혼 여성은 눈썹을 깎게 하지 않는 등 모두 일본의 농민(百姓)과 같이 해야만 한다17).

여기에서 보이는 아이누인(アイヌ人)의 ‘풍속개체․교화(改替․敎化)’라는 일련의 논의는 18세기말 이후 지식인이나 ‘탐험가(探險家)’의 에조치론(蝦夷地論)에 자주 등장하는 주장으로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 특유의 논리는 아니다. 그러나 후기미토학(後期水戶學)의 핵심적 주장이 제정교일치론(祭政敎一致論)을 배경으로 한 ‘국체(國體)’론인 것을 상기한다면 (후술) 나리아키의 이 주장은 그 연원의 하나가 에조치론(蝦夷地論)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데 있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18) 즉 ‘전례교화(典禮敎化)’에 의해 “민심(民心)를 하나”로 하는 일을 주장한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 1781-1863)의《신론(新論)》19) 등은 직접적으로는 1824년 영국선이 히타치 오오츠하마(常陸大津浜)에 상륙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집필되었던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마츠마에번(松前藩)에 소속된 영지(領地)라고 할지라도 영지는 일본의 영지”20) 라고 하는 명확한 境界意識으로 되어 있는 아이누인(アイヌ人)의 ‘풍속개량․교화(改替․敎化)’론의 하나의 발단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천황(天皇)․장군(將軍)이 지배를 안정시켜 평화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복종(畏服)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백성 모두가 마음을 한데 모아 일치단결하여 지배자에 대해서 친근감을 가지며, 천황 곁을 떠날지 못하는 정애(情愛)를 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21) 라고 하는 문장으로 시작되는《신론》은 심각한 대외 위기의식 속에서 그 긴박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백성이 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 즉 ‘민심수람(民心收攬)’이 긴요(緊要)하다고 하며, ‘민심수람술(術)’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술(術)’이란 먼저 ‘국체(國體-국가의 역사적 특징)’를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孝와 같은 감정으로 군주에게 충절(忠節)을 다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렇게 해서 충효(忠孝)는 하나가 되며, 교훈(敎訓)이나 올바른 풍속은 일일이 훈계(訓戒)하지 않아도 백성에게 자연스럽게 전파되게 된다. 또 제(祭-제사)와 정(政-정치)이 일체가 되며 정(政)과 교(敎-敎化)가 일체가 된다면 백성은 다만 천조(天祖)를 존경해 천윤(天胤)을 받드는 것에만 열중하는 것으로 뜻이 하나가 되며, 다른 일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모습은 아닐까”22)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충효일치(忠孝一致)’를 구현화(具現化)하고 ‘제정교일치(祭政敎一致)’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가 ‘제정교일치(祭政敎一致)’의 기본으로 든 것은 국가적인 ‘사례(祀禮)’였다. 즉 ‘천자(天子)’ 스스로가 ‘천신지기(天神地祇)’, ‘천조(天祖) 등을 제사 지내고, 조정(朝廷)이 오오나메노 마츠리(大嘗祭), 쯔끼나미노 마츠리(月次祭), 니이나메노 마츠리(新嘗祭)23)등을 실시하는 것으로써, “백성이 매일매일 이것에 의거해, 일일이 훈계(訓戒)하지 않아도 깨닫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여, 각자의 개개인이 군주에게 충성스러운 마음(忠心) 품고 조정(朝廷)을 우러러보게 된다. 여기에 있어 백성의 뜻은 하나가 된다24)”라고 하는 것이《신론》의 구상이다.25) 《신론》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그 ‘국체(國體)’를 신대 천황제(神代 天皇制) 그리고 신대중국에 의지하면서, ‘제사의 예(祀禮)’를 ‘천자(天子)’나 조정(朝廷)이 솔선수범하여 실시하는 것으로 인하여 도쿠가와 막번체제(德川幕藩體制)는 “민심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게 된다고 하고 있는 점이다.26) 게다가 실은 의외로 《신론》의 주장은 ‘서이(西夷)’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곳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제국이 타국을 침략하는 방법은 먼저 통상에 의해 상대의 동정을 엿봐, 간극이 있으면 군사적으로 침략해,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기독교를 포교해 민심(民心)을 동요 시키려고 한다.

······ (중략) ······

그 방법은 정말로 감탄할 만한 것이다27).

여기에는 ‘통상’․‘군대’․‘기독교’에 의한 ‘민심동요(民心動搖)’등 서양의 ‘술(術)’이 위기감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경계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에 의한 ‘민심동요’인 것은 명백하다. 그러니까 “서양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술(術)을 우리도 이용할” 것이 주장되어 “정치와 교화는 이민(夷民)을 교화하는데 효과가 크다. 그것에 의해 비록 서양이 변경 지역을 침략했다고 해도 이들을 섬멸해 우리의 위력을 전 세계에 나타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주변이민(周邊夷民)을 교화해 에조(蝦夷)제도, 산단(山丹)제국을 연달아 자주적으로 복종시켜 이것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한다. 싸우지 않고 이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의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핵심이다”28) 라고 ‘서양의 술(術)’을 거꾸로 이용하는 것에 의해 “주변이민(周邊夷民)을 교화” 하는 것이 주장되고 있다. 이 주장에는 물론 ‘선동적 과장(誇張)’이 포함되어 있어 시마바라의 민란(島原の亂)이나 잇코잇키(一向一揆)의 ‘기억’이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뇌리에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29) 그러나《신론》에 앞서 1806년경에 성립했다고 생각되는《치시마 이문(千島異聞)》30)에는 러시아의 표트르(Pyotr 대제)를 칭찬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표트르(Pyotr)는 학문에도 조예가 깊고 서양제국의 유명한 학자를 맞이해 학교를 곳곳 마다 세워 학생을 교육하고 있다.

····· (중략) ······

이러한 정책에 의해 학술․기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배출되어 러시아는 강대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또 페테스부르크에 있은 학교에도 교과(敎科 =교화학과 敎化學科), 치과(治科 = 정치학과 政治學科), 의과(醫科 = 의학과 醫學科), 도과(道科 = 도덕학과 道德學科) 등 4학과를 설치해 언제나 연구시키고 있다.

····· (중략) ······

표트르(Pyotr)는 지모(智謀)가 깊고 큰 뜻을 가져 오로지 민정(民政)․부국(富國)․개척(開拓)에 힘써 백성의 식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학교를 세우고 군사훈련에도 힘을 들여서 주변제국으로부터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31)

이 서적이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번역한《노서아지(魯西亞志)》, 마에노 료우타쿠(前野良澤)가 번역한《노서아본기략(魯西亞本紀略)》, 콘도 모리시게(近藤守重)의《변요분계도고(邊要分界圖考》, 야마무라 쇼에이(山村昌永)의《테이세이 소우테이 사이란 이겐(訂正增訂采覽異言》등의 다채로운 정보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가 러시아 정보를 나름대로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했으며 또한 표트르(Pyotr) 시대의 ‘인심수람(人心收攬)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상에 의해 밝혀진 것은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이라는 언뜻 유학적 양태(樣態)로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로 바로 서구제국의 침략성에 대해서 심각한 위기감을 품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감탄해 차라리 그 ‘술(術)’을 배우며 형성되어 졌다고 하는 것이다. 근대 일본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제국주의국가(帝國主義國家)로서 자기형성을 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 구조(イデオロギー構造)를 원초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이 서구로부터 배운 ‘술(術)’이란 것은 ‘제정교일치(祭政敎一致)’라고 하는 ‘인심수람(人心收攬)’을 극도로 중시한 교화정책인 것이다.

그런데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에 관해서 하나 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즉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등의 자타인식은 분명하게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주장을 계승한 화이사상(華夷思想)과는 이질적인 것이었다는 점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방에 위치 해 정기(正氣)가 발하는 곳이므로 군신부자(君臣父子)의 대륜(大倫)이 분명한 것은 전 세계에 비교할 곳이 없다.(《토쿠나오비노미타마(讀直毘靈)》32))

이 주장은 언뜻 보아 주자학(朱子學)의 이기론(理氣論)에 있었던 차별성 논리를 상기시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자학의 ‘리(理)’란 “천지만물의 각각에 동일한 성(性)을 주는 원리(原理)이고 ‘기’는 그것에 차별성을 부과하는 원리(=원인)이다”33). “만물은 일리(一理)를 근원으로 한다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평등하지만 ‘기’ 작용에 의해 차별상(差別相)이 발생한다”34).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가 주장하는 ‘정기(正氣)’ ‘편기(偏氣)’의 차이라는 것은 이 ‘기’의 차별상에 기초한 주장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주자학적 원리에 있어서는 ‘기’는 ‘일기(一氣)’의 “연속적 변역(連續的變易)”에 기초를 두는 일원적 성격을 띠고 있고 다양한 차별상이라고 하는 비연속(非連續)도 “동일한 원리의, 인식 상위에 기초해서” 발생하기는 것뿐이다35). 이 의미에서는 ‘기’의 정․편 차별상도 절대적인 것 일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가 주장하는 ‘정기(正氣)’ ‘편기(偏氣)’는 “일본은 태양이 뜨는 동방에 위치 해 정기(正氣)가 발하는 곳”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지리적․선천적으로 고정되어있는 것으로 절대적이다.36) 왜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일까. 사실은 ‘기’ 차별상을 보편상(普遍相)으로 환원하는 원리로서 존재하고 있던 ‘리’가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 등에 있어 해체되고 있다. 즉 “천리(天理)라고 하는 것은 주자학 이후의 후대의 유학자(後儒)가 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토쿠시나도노카제(讀級長戶風)》37)라고 하는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에 있어서, 주자학적 형이상학(朱子學的形而上學)은 불필요 했었다. ‘기’의 연속성을 지탱하는 원리(보편성 = ‘리’)가 해체되고 있었다고 본다면, ‘기’는 차별상에 있어 고정되는 것은 원리적으로 필연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주장이나 자타인식(自他認識)은 ‘리’에 담보된 화이사상(華夷思想)과는 달랐던 차별상을 강조하는 자타인식(自他認識)이었던 것이 분명한다.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의 주장과 근대 일본의 이데올로기(イデオロギー)가 재빠르게 화이사상(華夷思想)을 해체하여 차별적 자타인식(自他認識)을 형성해 간 배경에는 ‘리’부재의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의 양태가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附言하면 일반적으로 토쿠가와 유학(德川儒學)에 있어서 야마자키 안사이학파(山崎闇齋學派)를 제외하면 ‘리’ 경시라고 하는 경향이 지적되어 있다.38) 이 점도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의 관련에서는 검토될 필요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지적만 해두는 것으로 하고 싶다.

 

二.

조선 왕조 후기 19세기 중기 이후의 유학에 관해서 여기에서는 허유(許愈, 1833-1904)를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고 싶다. 허유는 조선 말기 영남주리학파(嶺南主理學派)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영남주리학파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토쿠가와(德川) 일본 유학과의 관련에서는 앞서 말한 야마자키 안사이학파(山崎闇齋學派)가 다대한 영향을 받았던 점,39) 그렇지만 그 ‘주리(主理)’학문적 경향은 도쿠가와(德川) 일본에서는 그다지 영향력을 넓히지 못했던 것을 지적 하고 싶다.

그리고 영남주리학파를 대표 하는 학자로서는 물론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 조식(南冥, 1501-1572)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명은 실천을 중시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조선 침략(임진왜란, 壬辰倭亂)에 즈음하여 남명의 문인들이 모두 의병활동(義兵活動)에 참여 해 큰 공적을 올린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남명학파(南冥學派)에 속하는 북인파(北人派)가 이후 조선왕조를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남명학파는 급격하게 침체해 대북파(大北派)와 소북파(小北派)로 분열한 점도 있어 쇠퇴하게 된다. 다음으로 1776년에 정조(正祖)가 즉위 해 영남 지역에 있어 다시 문운(文運)이 융성하게 되자 19세기에 있어 만성․박치복(晩醒․朴致馥, 1824-1894), 월고․조성가(月皐․趙性家, 1824-1904), 쌍주․정태원(雙州․鄭泰元, 1824-1880), 서계․금린섭(瑞磎․金麟燮, 1827-1903), 노백헌․정재규(老栢軒․鄭載圭, 1842-1911), 물천․금진호(勿川․金鎭祜, 1845-1908), 면우․곽종석(俛宇․郭鍾錫, 1846-1919), 교우․윤주하(膠宇․尹冑夏, 1846-1906)등 많은 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로 중추적인 위치에서 활약했던 인물이 허유였다.40)

허유는 일생 재야에서 오직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종사했다. 여기서 2, 3개의 주요 내용을《후산집》으로부터 인용해 보려고 한다.

堯之所以爲堯主理也. 桀之所以爲桀主氣也.  

             ·····(중략)·····

堯之氣雖善苟使肆然自聖任氣而做去了則堯不必爲堯.41)

理爲主而氣爲役則可以變化其氣質, 氣爲主而理爲役則可以移易其性情.42)

그 특질에 대해서는 별도로 검토될 필요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기(理氣)’에 대한 주자학적 논리가 ‘주리(主理)’론적 입장으로부터 행해져 그것이《후산집》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사단칠정(四端七情)’논에의 언급이나 불교나 양명학(陽明學)과의 엄격한 구분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기’나 ‘성․심정(性․心情)’ ‘태극(太極)’ ‘이일분수(理一分殊)’를 둘러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는 허유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긴요한 문제였던 것에 틀림없다.

《행장(行狀)》에서는 “大本一而己. 吾心之所以爲主宰者卽理也. 吾儒之學主理也.

·····(중략)······ 此又吾儒所以異於異端者也.”43)라고 그 ‘주리’론적 입장이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후산집》을 통람하면 퇴계 이황을 존신해 이황의 ‘이기비일물(理氣非一物)’설이나 ‘이기호발(理氣互發)’설 등을 이론적인 입론으로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허유는 이러한 입장에서 ‘이기일분(理氣一分)’설, ‘대극무동정(大極無同定)’설, ‘이존기비(理尊氣卑)’설 등을 비판해 양명학에 대해서도 ‘기’를 ‘이’로 인식하고 있다. 라고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외에 ‘화이인수지별(華夷人獸之別)’에 관련되는 주장도 엄격하며 거기에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리’론적 입장으로부터의 화이론(華夷論)이라는 것은 물론 최종적으로는 ‘리’의 보편성에의 신뢰에 의거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다루었던 요․걸(堯․桀)의 사료에도 그것은 나타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다음 사료에도 주목 해 보려고 한다.

人與物性何以同卽理故同, 何以異因氣而異也. 異雖因氣異底實理其同, 其異只是理.44)

여기에는 천지의 ‘이’를 얻었던 것은 인(人)과 물(物)은 같지만 물의 ‘기’는 편색(偏塞) 하는데 ‘심(心)’이 주재할 수가 없고, 따라서 ‘합(合)’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인(人)의 ‘기’는 ‘정통’이기 때문에 ‘심’이 주재할 수가 있으므로 ‘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속해서 물과 인이 구별되는 것은 ‘의리지심(義理之心)’에 있다고 해 이 ‘의리지심’은 성인(聖人)도 범부(凡夫)도 같다고 했다. 이것은 ‘이일분수’로 생각하면 ‘이일’ 측면에서 보면 인성․물성(人性․物性)이 같고, ‘분수’ 측면에서는 인성․물성이 달라 사람만이 정통한 ‘기’를 얻고 있으므로 물과는 확실히 구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은 ‘의리지심’이 있고 물은 ‘형기지심(形氣之心)’ 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물이 같은 것은 ‘이’이고 다른 것은 ‘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理氣’론의 입장으로부터 이동론(異同論)은 물론 허유만의 논리는 아니며 온당한 ‘이기이원(理氣二元)’론적인 주자학적 언설(言說)이라고 해야 할 것일 것이다. 그렇지만 19세기 후기에 있어서도, 역시 이러한 ‘리’의 보편성으로 원칙적 입장이 관철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쿠가와(德川) 일본이나 근대 일본 유학자(儒學者)의 대부분이 앞서 본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적인 전환(轉回)을 이루어 간 것과 비교하면 그 대조성은 선명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다시 생각해 보면 허유가 살았던 시대는 바로 조선왕조가 서양이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노출되어 이윽고 왕조 자체가 일본의 식민지화에 의해 멸망해 가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전제체제(노론파 전제체제, 老論派專制體制)로부터 대원군(大院君) 의 전제체제(‘사색평등 四色平等’ 체제), 민비(閔妃) 정치로 변천시켜 가며, 조선왕조는 이 난국을 필사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사상적으로는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과 개화사상, 존화양이(尊華攘夷)․사대(事大)사상과 개화․독립론 등이 교착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일본의 무력(武力)에 의해 개국․불평등 조약 체제에의 강제적인 참가가 이루어지게 된다.45) 이러한 와중에 허유는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事變)에 즈음해서는 일본군이 王城을 침범했다고 하는 사건을 듣고 현감(縣監)에게 서간을 보내 국왕에게 알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 눈에 띄는 정치 활동은 적고, 단지 향교(鄕校)에서의 강의나 제자 교육을 중심으로《남명집(南冥集)》의 교정, 《이학종요(理學綜要)》의 교정이나 《한주집(寒州集)》의 간행 등에 종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46) 복제 변혁에 즈음해서는 오랑캐(夷狄)가 되는 것이라고 개탄해 마지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생각해 보면 보수적인 주자학자·교육자라고 하는 모습도 부상된다.

그렇지만 20세기가 전쟁과 살육 시대인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허유 사상이 보여주고 있는 조선왕조 주자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많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유학․주자학은 서양 제국주의 사유를 앞서서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써, 확실히 그 해체의 대가로 재빨리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사적으로는 ‘이’의 보편성의 해체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앞서 말했다. 허유가 ‘이’의 보편성에 계속 집착했던 것은 확실히 근대화라고 하는 시각으로부터 보면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진다. 그러나 마침내 식민지화 되어버린 조선에서 유학․주자학의 훈도를 받은 허유의 제자들이 독립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것을 포함해 오늘날 그 의의는 재평가되는 것이 당연 하다고 생각된다.

일본 유학․주자학에 관해서도 후기 미토학(後期水戶學)과는 다른 입장에 섰던 소수의 원칙적인 ‘주리’론적 주자학자는 예를 들면 청일전쟁(日淸戰爭, 1894-95)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반대한 입장에 있었던 것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47) 근대화를 척도로 하지 않고 이러한 ‘리’의 보편성의 입장을 견지한 유학자(儒學者)․주자학자들의 지평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 것은 특히 현대에 있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공동성을 모색하는데 있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작업이 될 것이다.


※註は省略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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